[세계]미국 식탁 위의 혁명 ‘슬로푸드’
친환경 재료로 만든 전통요리 각광… 뉴욕서 텃밭 위탁관리사업도 등장
"패스트푸드는 노(no), 슬로푸드는 예스(yes).”
맥도날드의 황금색 아치로 대표되는 ‘패스트푸드의 천국’ 미국에서 최근 패스트푸드 퇴출 바람이 거세다. 뉴욕, 샌프란시스코 등 대도시에서 패스트푸드에 트랜스 지방의 사용이 엄격히 금지된 데 이어 아예 패스트푸드 식당의 신설까지 막고 있다. 성인 5명 가운데 1명이 비만일 정도로 비만율이 심각한 상황에서 그 원인으로 패스트푸드가 지목된 탓이다.
지난 7월 23일 샌프란시스코 시청 앞 잔디밭에서 열린 슬로푸드 네이션 축제에 참가한 소녀가 채소에 물을 주고 있다. <경향신문>
이 같은 분위기는 패스트푸드와 반대로 담백하고 깔끔한 재료로 조리해 손맛이 담긴 ‘슬로푸드’가 각광받도록 만들고 있다.
지난 1일, 아널드 슈워제네거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2010년부터 주 내 모든 식당에서 트랜스 지방의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그동안 뉴욕과 보스턴, 필라델피아 등 대도시에서 트랜스 지방의 사용을 금지한 사례가 있지만 주 차원에서 법안을 마련, 통과시킨 것은 캘리포니아가 처음이다.
공공의 적, 패스트푸드
트랜스 지방은 마가린, 쇼트닝 등 액체 기름을 고체로 굳히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질로 동맥 경화와 심장 질환, 비만 등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트랜스 지방은 주로 감자 튀김이나 햄버거 등 패스트푸드에 다량 함유돼 있다.
이번 법안 통과로 캘리포니아에 있는 모든 식당은 트랜스 지방을 사용할 경우 최소 25달러에서 많게는 1000달러에 달하는 벌금을 물어야 한다.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la)는 비만율이 높은 남부 지역 빈민가에 아예 새로운 패스트푸드 식당의 개점을 금지했다.
la만 놓고 볼 때 도시 지역 성인의 19.1%는 비만이다. 빈민가인 남부로 내려가면 비만율은 30%로 높다. 히스패닉(28.7%)과 흑인(27.7%)의 비만이 백인(16.6%)보다 심각하다. 어린이들 역시 도시 지역의 비만율이 25%인 데 비해 남부는 30%에 달한다.
이에 비만의 원인으로 지적되는 패스트푸드를 아예 퇴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실제 kfc, 타코 벨 등 유명 패스트푸드 식당의 어린이 메뉴 대부분은 정량 칼로리를 초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소비자보호단체인 공익과학센터(cspi)가 13개 주요 레스토랑 체인에서 제공하는 어린이 메뉴를 조사한 결과 1474개 메뉴 중 93%가 적정 수준인 430㎈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430㎈는 미 국립의학연구소(nim)가 4∼8세 어린이에게 권장하는 하루 섭취 칼로리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이 같은 조치가 알려지자 대형 패스트푸드 체인은 물론 일반 식당도 반발하고 있다. 식품은 선택의 문제일 뿐이며 정부가 지나치게 간섭하고 있다는 것. ‘캘리포니아 요식업 협회’의 앤드류 카사나 대변인은 “이 다음 번엔 비만인 사람들은 치즈버거를 먹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법을 만들 작정이냐”며 비판했다.
하지만 당국은 사회 문제로 번진 비만율을 고려할 때 꼭 필요한 조치라고 설명한다. 비단 정부의 조치뿐 아니라 일반 고객의 ‘삶의 질’에 대한 경각심이 커지면서 패스트푸드 업체의 변신은 결국 대세로 자리 잡을 전망이다. 맥도날드, kfc 등 대형 업체는 트랜스 지방이 없는 새로운 튀김 기름을 사용하고 어린이 메뉴에 콜라 대신 우유를 넣는 등 변신을 꾀하고 있다.
환영받는 슬로푸드
패스트푸드를 외면한 사람들이 최근 들어서는 새로운 식생활 운동에 눈을 뜨고 있다. 간편하고 빠르게 미리 조리한 음식을 데워먹는 패스트푸드 대신 신선한 친환경 재료를 가지고 전통적인 방법으로 시간을 들여 조리한 ‘슬로푸드’를 주목하고 있는 것.
1986년 이탈리아의 저명 요리 저술가 카를로 페트리티가 시작한 슬로푸드 운동은 ‘음식이란 단순히 만들고 먹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기치로 내건다. 그는 지난해 한 인터뷰에서 “환경을 생각하지 않은 미식가는 멍청하지만, 미식을 생각하지 않는 환경론자는 비극이다”라고 말했다.
슬로푸드는 1990년대 후반 미국에 소개됐으나 처음에는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했다. 먹는 것 하나에 지나친 철학을 부여했다는 사람들의 거부감과 기존 식생활에 대한 익숙함이 컸던 탓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건강과 환경, 삶의 질을 고려하는 웰빙 트렌드와 맞물리면서 차츰 주목을 받고 있는 모습이다.
그 최전선에 있는 단체가 약 1만6000명의 회원을 거느린 ‘슬로푸드 usa’다. 슬로푸드 usa는 오는 29일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슬로푸드를 즐기는 축제인 ‘슬로푸드 네이션(slow food nation)’을 개최할 예정이다. 사흘간 열리는 축제에서 참가자들은 피클이나 커피, 살라미 등 슬로푸드를 맛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슬로푸드에 대한 강연을 듣거나 파티를 즐길 수 있다. 200만 달러를 들인 이번 행사에는 5만 명 이상이 참가할 것으로 보인다.
슬로푸드 usa는 7월 23일 축제의 중심 기지가 될 샌프란시스코 시청 앞 잔디밭에 300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85가지 채소를 심는 텃밭 가꾸기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슬로푸드 usa의 에리카 레서 회장은 “이번 축제는 미국에 슬로푸드 운동을 뿌리 내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의욕을 보였다. ‘조리의 슬로’를 넘어 아예 정원에서 식재료를 직접 가꾸는 사람도 늘어나는 추세다. 농약을 덜 사용해 믿을 만하고, 점점 가격이 오르는 식료품값을 대체할 수 있어 일석이조의 효과도 얻는다.
뉴욕에서는 정원 관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텃밭을 대신 꾸며주는 신종 사업도 등장했다. 70달러(약 7만 원)면 오이와 당근, 토마토 등을 심고 잡초 제거 등 관리는 물론 수확도 대신 해준다.
뉴욕타임스(nyt)는 “환경에 대한 관심이 건강에 대한 걱정과 맞물리면서 슬로푸드 운동이 본격적으로 대중의 관심을 얻기 시작했다”면서 “미국의 식생활이 대변화를 앞두고 있다”고 전했다.
<국제부┃박지희 기자 viole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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