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 연기, ‘원점 재협상’ 안한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

ㆍ정부, 강행 고수하다 왜 미뤘나
ㆍ“국민과 소통” 李대통령 언급후 기류 변화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수입위생조건 개정안을 15일 고시하겠다던 입장에서 한 발 물러나 7~10일가량 연기하는 방안을 검토키로 했지만 재협상 없는 고시 연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현재로선 입법예고 기간 중 제출된 의견 334건의 검토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여론수렴’이란 명분을 쌓은 뒤 원안대로 수입위생조건을 고시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정부가 고시 연기 방침을 밝히면서도 ‘재협상 불가론’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 고시 강행에서 연기로=정부는 한·미 쇠고기 협상에서 새로운 수입위생조건의 고시 시행일에 대해 미국과 합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13일까지 입법예고를 거친 뒤 15일 고시하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근거가 수반되지 않은 새로운 수입위생조건 반대 이유로는 고시를 연기하기 어렵고, 미국과의 신뢰관계를 감안해야 한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다.

하지만 지난 13일 이명박 대통령이 “식품안전 문제는 국민과의 소통이 필요하다”고 밝힌 데다 같은 날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국회 청문회에서 “고시 연기 방침을 농식품부와 협의하겠다”고 언급한 이후 기류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농식품부 김현수 대변인은 14일 “새로운 수입위생조건의 입법예고안에 대해 13일 하루에만 300건이 넘는 의견이 제출되는 등 검토 작업에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여 고시 공포를 연기하는 것이 불가피해졌다”고 설명했다.

농식품부로서는 여당에서조차 고시 공포에 대한 신중론이 제기되고, 야당이 고시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 카드를 꺼내드는 등 강경대응에 나선 것에 부담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한·미 쇠고기 합의문에는 수입위생조건 고시일은 명확하게 못박혀 있지 않다.

다만 합의문 서문에 “한국은 5월15일에 법적 절차가 종료돼 시행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하였다”는 부분이 있지만 이는 우리 정부가 15일에 반드시 고시해야 한다는 의무를 규정한 것은 아니다.

◇ 재협상없는 연기는 무의미=새로운 수입위생조건을 농식품부 장관이 고시한 이후에는 법적 효력이 생겨 사실상 미국과의 재협상이 어렵게 된다. 이에 따라 정부가 이날 고시를 7~10일가량 연기키로 한 것은 재협상으로 가기 위한 첫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의 고시 연기 방침은 수입위생조건 개정을 전제로 하거나 재협상을 염두에 두었다기보다는 ‘시간벌기용’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수입위생조건 고시를 최대 10일가량 늦추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정운천 농식품부 장관의 발언은 17대 국회의 회기가 오는 24일 마감된다는 점과 미국에 파견된 쇠고기 작업장 현지 검역단이 25일 귀국한다는 점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로서는 새로운 수입위생조건 고시를 연기한 뒤 미국이 우리 정부에 먼저 재협상을 요구하는 상황이 오길 기대할 수도 있으나 가능성은 높지 않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한택근 변호사는 “정부가 입법예고안에 대한 의견을 충분히 검토했다든지, 미국에 파견된 검역단이 돌아온 뒤 쇠고기 작업장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등 명분을 축적한 뒤 수입위생조건을 원안대로 고시하게 되면 고시 연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한 변호사는 “미국산 쇠고기의 30개월 연령제한 해제의 전제조건이 됐던 미국의 동물성 사료금지 조치가 대폭 후퇴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이 같은 문제점이 드러난 이상 고시 연기가 아닌 재협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