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맛여행]풍요를 꿈꾸며 배불리 먹는 날… ‘정월대보름 음식’


3월 상순의 날씨가 맑을 것이라는 기상청 예보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기온이 평년보다 3도 정도 높아져 조금 더 따뜻할 것이라는 예보는 더욱 다행스럽다. 2007년 정월대보름은 3월4일 일요일이다. 종일 먹고, 밤에 산책하며 달 구경하고, 정월대보름 축제의 궁극적 목적인 ‘재수 좋은 일년’을 소원하기에 적당한 날씨 아닌가. 그렇다. 이날은 한 해의 재수를 기원하는 날이다. 사랑이 이루어지길, 아이가 태어나길, 시아버지께서 재취업하시길, 이제는 사업이 자리잡기를, 출근길 지하철이나 버스에 꼭 내 좌석이 있기를….

정월대보름은 1박2일 동안 먹는 걸로 시작해서 먹는 걸로 끝나는 날이다. 아마 18개 풍속(설, 정월대보름, 머슴날, 영등제, 삼월삼짇날, 한식, 사월초파일, 단오, 유두, 삼복, 칠석, 백중, 추석, 중구, 상달고사, 손돌풍, 동지, 제석) 가운데 가장 많이 먹는 날이 아닐까 싶다. 당연한 것이, 이제 한 해를 시작하는 마당에 든든히 먹어야 건강하게 일도 잘 하고 돈도 잘 벌어올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정월대보름이 ‘식음 퍼포먼스’만 무성한 날은 아니다. 아시다시피 쥐불놓이, 길놀이, 연날리기, 강강수월래 등 ‘몸짓 퍼포먼스’도 즐길 수 있는 날이었다. 지금 아파트 놀이터 앞에서 양손 잡고 강강수월래 빙글빙글 도는 사람들은 없어졌지만, 음식과 관련된 풍속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정월대보름의 대표 메뉴는 역시 오곡밥이다. 오곡밥은 대보름 전날, 그러니까 정월 열나흗날에 지어먹는데, 꼭 장수를 빌면서 먹어야 하며, 대보름 당일에도 계속 먹는 게 재수가 좋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오곡밥은 하루에 아홉 번 먹되 아홉 가지 나물과 함께 먹어야 운수대통한다는 속설이 있다. 더욱 재수가 좋으려면 각기 다른 성을 가진 세 사람의 이웃과 나눠먹는 게 좋다. 내가 지은 오곡밥을 이웃의 세 집에 나눠주는 것도 결국 내 복을 불리는 방법이기도 하다. 세(三)집에 오(五)곡밥에 아홉(九)끼, 아홉가지 나물 등 홀수 단위로 챙기는 것 또한 홀수를 양기로 믿는 습성에서 비롯되었다. 우리 몸이 잡곡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이미 웰빙 식단을 통해 입증되었다. 소화가 잘되고, 영양이 좋으며 면역력을 길러줘 무병장수에도 도움이 된다.

오곡밥은 찹쌀을 씻어 30분 이상 불린 다음, 깨끗이 씻어 물기를 뺀 나머지 곡식을 골고루 섞어 넣고 적당량의 물을 붓고 소금을 넣어 센 불로 끓인 다음, 밥물이 끓어오르면 주걱을 이용하여 밥솥 안을 위아래로 휘적거리며 골고루 섞어준다. 이렇게 섞어주다 찰기가 느껴지면 불을 약하게 줄이고 15분 이상 뜸을 들이면 부드러운 오곡밥이 완성된다.

이렇게 만든 오곡밥을 진채식(陳菜食)과 함께 먹으면 금상첨화다. 진채식이란 묵은 나물을 뜻한다. 옛날 정월대보름에는 아직 봄나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 가을에 말려서 보관해 놓았던 나물을 들기름이나 참기름에 볶고 무쳐서 오곡밥과 함께 먹음으로써 에너지를 보충해 준 것이다. 지금은 한겨울에도 야채를 먹을 수 있는 시절이지만 정월대보름에 먹는 나물은 가급적 말린 식재를 사용하는 게 제격이다. 호박고지·박고지·말린가지·말린버섯·고사리·고비·도라지·시래기·고구마순 등은 모두 가을에 말려놓았던 것으로, 고들고들해진 나물을 물에 충분히 불렸다 양념을 하여 볶아 먹으면 시간이 만들어낸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앞에 열거한 나물의 종류를 꼭 고집할 필요도 없다. 요새는 콩나물, 숙주나물, 취나물, 무나물 등을 아홉 가지 나물 안에 넣어 먹기도 한다. 이렇게 만든 나물을 오곡밥과 함께 구운 김에 싸먹는 복쌈도 정월대보름에 먹는 기복 메뉴 가운데 하나다.

정월대보름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잣, 땅콩, 밤, 호두 등 견과류를 이빨로 빠지직 소리가 나도록 깨무는 풍속을 부럼이라고 한다. 이것을 하면 이가 튼튼해지고, 치아에 힘을 줌으로써 뇌에 전기작용을 일으켜 기억력이 좋아지며, 신장 기능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 부럼의 효능은 근거없는 속설이 아니다. 실제로 호두 등 견과류에는 프로테아제 억제제, 폴리메놀류 등 암세포의 발생과 성장을 억제하는 요소가 들어있으며 노화를 방지해주는 비타민E,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주는 불포화지방산 함유량도 높다.

이렇듯 부럼은 영양은 물론, 깨물고 부수고 씹는 과정을 통해 겨울철에 위축되어 있던 신체 리듬을 깨워주는 역할까지 해주고 있는 것이다.

정월대보름의 마지막 메뉴는 귀밝이술이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찬 술 한 잔을 마시면 일년 내내 남의 말이 잘 들리고 좋은 말, 영양가 있는 정보가 쏙쏙 들어오게 된다.

이렇듯 끊임없이 먹으며, 쉴새없이 소원하며, 즐거운 하루를 보내게 되지만 꼭 먹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그것은 바로 더위다. 정월대보름에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지 말아야 한다. 무심코 “엉?” 또는 “예!” 하고 대답을 했을 때 상대방이 “내 더위!” 하고 외치면 여름에 상대방의 더위까지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대답하지 않고, 먼저 “내 더위!”를 외치면 오히려 상대가 내 더위까지 가져가게 된다.

밤이 내리면 마당이나 집 근처 동산에 올라 달구경하는 것을 빼놓지 말자. 하루 동안 소망했던 일들을 달님을 보며 다시 빌어야 소원이 제대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또한 달구경 하면서 소화도 시키고, 처녀 총각들은 눈이 맞아 가슴이 뜨거워질 수도 있으니 일년의 모든 소원을 성취할 기회가 정월대보름 밤에 비로소 생기게 되는 것이다. 우리 전통으로서의 정월대보름 진수를 만끽하고 싶은 사람은 대보름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여행을 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3월4일 기준으로 수원 평동새마을금고, 분당구청, 일산 고봉동 성석진밭 마을 등에 찾아가면 즐겁게 체험할 수 있다.

〈이영근|여행작가·나비콘텐츠플래닝 대표 blog.naver.com/ichek007〉

[경향신문]